#2-7 스페인의 마지막 도시, 세비야(SEVILLE)에서의 리프레쉬
"세비야가 뭐가 그리 좋은 지 직접 가보아주마!" 라고 생각했으면서, 조건을 다르게 설정한 것은 공평하지 못했다.
세비야에서는 호화로운 에어비앤비 독채를 예약했기 때문이다.
이 숙소를 예약한 것은 바야흐로 열흘 전 마요르카에서 인도인친구에 시달릴 때였다.
혼자 있을 시간이 곧 필요할 때가 오겠다 싶어, 아파트를 빌렸다.
세비야에 도착했다.
버스터미널에서 숙소까지는 도보로 십분 여 더 걸어야 했는데, 왠지 이미 한국인 관광객이 곳곳에서 보였다.
아마 그라나다->세비야 루트가 대중적인 방향이기 때문이겠지.
숙소는 번화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지만 비교적 주택가 쪽이라서 내겐 최적이었다.
근처에 내 최대 마트 '리들'도 있었고, 조금만 걸어가면 식당들과 번화가 초입부도 보였다.
내가 빌린 숙소는 요즘 자주 보게 되는, 사업으로 집을 빌려 임대하고 있는 케이스였다.
그래서 체크인을 스스로 하고, 주인을 만날 일은 없다.
집을 처음 보았을 때, "기가 막히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만큼 마음에 들었다는 뜻.
깨끗하고, 넓은 거실에, 큰 티비, 부엌, 세탁기도 빌트인이고, 침대 방도 따로 있는데 아늑하고 인테리어까지 마음에 들었다.
아쉬운 것은 통창이 있는데 그게 건물 내부로 향하고 있어서 바깥 공기를 마시기에 좋은 아파트 형태는 아니었다.
그래서 에어비앤비로 쓰이는 걸지도..? 통창 베란다를 열면 사각형 아파트의 내부 복도 쪽으로만 공기가 통한다.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어찌되었든 집은 홀로 지내기에 너무나도 편한 조건이었다.
그래서 나는 잠시 식료품을 공수할 겸 리들 마트를 다녀온 후 밖에 거의 나가지 않았다.
'걷는 여행'의 유일하게 쉬는 기간. 밖에 나가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 좋은 숙소를 두고 어딜가냐며, 아주 늦은 저녁에 잠시 바람만 쐬러 살짝 외출했을 뿐, 체크아웃 날까지 방에만 콕 박혀서 즐거운 자취생활을 체험했다.
와인도 들이키고, 티비도 틀어보고, 저렴한 식재료로 새우 소금구이를 하고, 고기도 구워먹고, 빨래하고, 낮잠자고, 책도 읽으면서 미래의 자취생활을 꿈꾸던 시간. 너구리 라면도 구해와서 라면도 끓여먹고, 감자칩도 사다먹고... 아주 신났어.
그래서 세비야를 공평하게 평가할 수 없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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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예 외출하지 않은 건 아니다.
느즈막히 강가를 산책하러 다녀오거나, 세비야 광장의 아름다움을 눈에 담고 돌아오거나..
아 그래! 그 때가 마침 주헌절이었다. 동방박사 오신날.
크리스마스는 가족들과 보내느라 길이 오히려 조용하고, 동방박사 오신 날(1월6일)이 도시적으로는 더 큰 행사였다.
그 전야제랄까, 1월5일에는 어마어마한 퍼레이드, 차를 타고 지나가는 귀여운 코스튬의 행사참가자들이 뿌리는 대량의 사탕, 그 흩뿌려지던 사탕을 줍기위해 애 어른 할 것 없이 집에서 봉지를 가져와 신나게(미친 듯이) 담던 그 유쾌한 모습.
에어비앤비 숙소와 더불어, 이 퍼레이드가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그렇게 전체적으로 평화로운 잉여생활을 즐긴 후, 체크아웃 후 캐리어를 끌고 길을 나섰다.
하루아침에 집을 잃은 사람마냥, 유독 캐리어가 무겁게 느껴지던 그날 아침.
시내 한복판의 짐 보관소에 캐리어를 맡기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 때가 주헌절 다음날이라, 스페인은 이 때부터 대대적인 세일, 블랙프라이데이 저리가라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세일의 시작이었다.
나는 한정된 시간, 돌아갈 숙소가 없어 불리한 조건을 딛고 짧은 시간 내에 많은 가게들을 둘러봤다.
(결과적으로 세일하는 품목은 사지 못했지만... 그래도 잠들어있던 물욕이 샘솟는 하루 였다. 내가 쇼핑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면 이 날 세비야를 다 털어갔을 것이지만.. 나는 물건을 하나 사는 데도 시간이 엄청 걸리는 타입인지라 아무 것도 골라올 수 없었다..)
이 날이 세비야, 그리고 스페인의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이제 포르투갈의 남부, 라고스(LAGOS)로 떠난다.
내 인생 여행지. 돌아가고픈 시간. 여행의 절정. 내가 꿈꾸던 이번 여행의 형태를 제대로 경험한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