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야도 물론 훌륭한 휴가였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남부 라고스에서 찾은 행복에 비하면....
라고스는 축복받은 마을이었다.
남부 끝자락에 위치한 이 곳은, 여름에는 휴양을 원하는 많은 유럽인들의 휴가지로 사랑을 받는 곳이다.
아름다운 해변이 끝없이 이어져, 내가 원하는 해변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으며 다양한 수상스포츠를 체험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크루즈투어, 카약 동굴투어, 돌고래 관찰 보트투어 등등 선택할 수 있는 액티비티의 범위가 넒어서 수상스포츠를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다들 이 곳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간 시기는 비수기였다. 완벽하게.
1월 초에는 아무리 포르투갈이라 덜 춥다고 해도 수상스포츠를 할 시기는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체크인했던 (인생)호스텔은 방이 전혀 붐비지 않았다. 아니 거의 텅텅 비다시피 했지.
마을은 작았고, 그래서 호스텔은 중심지에서(읍내라고 부르고 싶다)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6인실을 예약했었고 그래서 들어간 방에는 다소 비좁은 공간에 여럿의 숙박객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1층침대를 희망한다고 말했고, 나중에 다시 옮겨주겠단느 직원의 말에 '알았다'고 대답했다.
이러다가 또 안바꾸어 주려나...
그런데 그 직원이 다시 와서는, 8인 도미토리에는 자리가 있는데 거기라도 쓸래? 이유는 '나중에 침대를 다시 옮기면 청소하는 직원이 일을 두번 해야하기도 해서' 였다.
그래서, 난 속으로 '일부러 6인 도미토리 쓰려고 돈을 하루 2유로 더 냈는데 아깝다'라고 생각하며 8인 도미토리 룸으로 갔는데 왠걸....?
훠얼~~씬 방이 넓고(8명이 쓰는 걸 전제해도 8인이 더 널찍한 건 왜....? 6인실은 캐리어 피기도 힘든 통로였다고!
심지어 그 방에는 숙박객이 나 뿐이었고, 발코니도 연결되어 있어 정말로 평화로웠다.
하루 2유로의 아쉬움은 온데간데 없고, 나 혼자 이 큰 도미토리룸을 쓸 수 있다는 것에 들떴던 첫날 밤이었다.
(나는 이 곳을 떠나기 아쉬워 연장까지 해가며 열흘 정도를 묵었는데, 마지막 이틀을 제외하고는 나 혼자 뿐이었다!)
발코니에서는 시내 전망, 해변 전망이 보인다. 사실 해변이 바로 앞은 아닌데, 더 좋았던 건 주변의 예쁜 주택, 건물들이 보이는 점이었다. 아기자기하고 이국적이라 오히려 해변전망보다 더 보기 좋았다.
6인실 사람들(알고보니 길거리 공연하러 오신 일행들이었다고..)이 떠나고 그 발코니는 오로지 내 소유였다.
방 3개가 같은 큰 발코니를 공유하는 형태였는데, 옆 방은 빈 방으로 두었고, 원래 내가 배정받았던 6인실도 공연멤버들이 떠난 후에는 쭉 빈 채였으니.
세비야에서 호사스럽다고 생각했던 에어비앤비의 1/4 가격으로 이런 호화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다니 감격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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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스 시내는 정말 조용했고, 비수기라 가게들이 문을 닫기도 해서 갈 수 있는 가게도 한정적이었다.
나는 작은 마을을 며칠 새에 완전히 외웠고, 그럴 수 밖에 없던 게 도보 십여 분 정도면 중심이 되는 거리의 왠만한 가게를 다 눈에 담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해변가는 길게 이어져 있고 조금씩 형태가 달라서 보는 재미, 고르는 재미가 있었다.
게다가 당연하게도 해변가 역시 사람이 드물어서, 나는 때때로 해변을 통째로 빌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름에는 이 곳이 사람들로 북적북적 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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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가 라고스를 인생여행지로 꼽는 이유 중 하나는, 이 도시나 호스텔에 대한 것이 아닌 다른 이유에서이다.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만끽하고 있던 어느 날.
아침에 세면대에서 뭔가를 하던 중에 동양인으로 보이는 여자아이를 만났다.
외국여행 중에는 그렇듯, 나는 자주 용기를 내어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미소를 지어보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Hello!"라고 했던 듯 싶다. 무언가 인사를 건넸다.
피부가 어마어마하게 예쁘고 (평가하는 듯 해서 조심스럽지만) 정말로 미인인 여자아이였는데 수줍게 대답을 했었었나.,..?
그 후 조식시간에 다시 만났다.
그녀가 한국말로 말을 걸었다. (그렇다. 나는 한국인과 일본인, 중국인을 잘 구분못한다. 다른 한국인들은 잘만 하더라)
목소리도 매력적인 그 친구는 느낌이 정말 좋았다.
나는 사회생활 경력이 그리 많지 않아서 사람을 보는 눈이 아직 트이질 않았는데, 그녀는 확실하게도 '좋은 친구, 착한 아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얘기를 조금 나누고, 좋은 느낌 그대로 간직한 채 서로의 일정을 보내러 떠났다.
저녁에, 여행지에서 할 일이란 게 뭐가 있겠는가.
여기는 더군다나 시골마을. 나는 맥주 한 병와 나초를 사왔다.
그리고 병을 따러 주방으로 갔다.
아침에 봤던 그 느낌좋은 아이가 컴퓨터로 무언가를 작업 중이었다.
나는 "맥주 있는데 혹시 괜찮으시면 같이 드실래요?" 라고 권했다. 먹을 걸 가져와서 병따개만 쓰고 쓱 지나가는 것은 한국인의 특성으로 정 없어보이지 않는가. 물론 같이 마셔주면 더 기쁘기도 하구.
그녀가 흔쾌히 오케이 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고, 정말 잘 통해서... 음... 맥주가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
얼마나 마셨는 지 기억은 안나지만, 처음 사온 맥주는 금방 떨어져서 다시 동네 슈퍼로 가서 사왔다.
그 것도 떨어져서 와인을 사러 또 다른 동네 슈퍼로 갔던 거 같기도 하고.
거실에서 티비보던 호스텔 매니저님(친절 그 자체!)이 '너희 술이 점점 커진다'라며ㅋㅋㅋㅋ
정확히 얼마 마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는 술집이 문을 닫아서 저 멀리 주유소에 딸린 슈퍼까지 다녀왔다.
그게 마지막 병이었고, 우린 거나하게 취해서 내일을 기약하며 각자의 방으로 헤어졌다.
그 아이가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고, 한국와서도 만났으며, 다음 주에도 만나기로 약속한 동생 ㅇ이다.
이 인연이 있어서 라고스가 더욱 더 빛났다고 확신한다.
ㅇ이가 나보다 며칠 일찍 떠났는데, 그 전과 후로 라고스가 확실히 다르게 느껴졌달까.
조금 외로워졌지. 그리고 아무리 아름답고 조용한 루프탑도 그녀와 함께 와인을 까던 그 때의 느낌과는 달랐으니까.
하루종일 서로 각자 일정을 보내다가, 저녁이면 만나서 자연스럽게 와인을 오픈하고 이야기를 나누던 그 때가 있어서 여태 라고스를 잊지 못하고 종종 그 추억을 곱씹어본다.
ㅇ이는 나보다 오래 여행을 했다. 세계여행이어서 아시아도 돌다가 한국으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지금은 일을 하며 바쁜 와중에도 종종 카톡을 주고받고 있다.
ㅇ이가 마지막 떠나는 날, 내가 아이를 동네 어귀까지 배웅했고, 그녀는 버스출발시간 전까지 카페에서 시간을 잠시 보내다가 떠나겠다고 했다. 나는 배웅 후 숙소에 돌아와 쉬고 있었다.
잠시 후에, ㅇ이가 연락을 주었다.
잠시 호스텔 입구로 나와줄 수 있냐고.
무슨 일인가 싶어 나가보았다.
그녀가 그 큰 침낭가방과 짐을 그대로 들고 다시 호스텔로 왔던 것이다.
그리고 내게 편지를 쓴 엽서와 빵 몇개를 선물로 들려주었다.
내가 이렇게 감동을 받아본 적이 몇 번이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 순간 순수하게 감동을 받았다.
ㅇ이가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나를 위해 일부러 엽서를 사서 편지를 예쁘게 쓰고 빵까지 사서, 그 무거운 침낭가방을 들고 한참을 돌아왔다는 것이 말이야.
마음이 촉촉하게 젖는다는 게 이런걸까 싶었다.
정말 감동을 받아서 엽서를 몇번이고 읽고, 기념으로 남기고 싶어서 사진으로도 찍어서 카카오톡 프사로도 오래도록 사용했다.
ㅇ이가 내 라고스 추억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결정타가 되었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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