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여행이라고 표현 하지않는다. 머물고 싶은 도시.
그래서 번화가도 아닌, 새로 생긴 빌라촌 쪽의 어느 에어비앤비로 예약을 했다. 총 13박. 비용은 50만원 가량.
자취방 같은 원룸이라 부엌도 간소하게 있어서 '머물기'에 편리한 방이었다.
사실 여기 말고 통영 충렬사 근방에 오래된 낡은 아파트 집을 개조해서 만든 어느 집을 찜해두었었는데, 그 집이 갑자기 예약불가로 전환되어 버렸다. 무슨 사정인지... 정말 가고싶었던 곳인데 그래서 갑자기 저 원룸으로 선회한거다.
사실 2019년 2주간의 통영은 여행이 아니라, 혹 통영에 거주할 일이 생길 지 모를 일을 대비한 사전답사 개념이라고 봐도 좋다. 그 곳에서 하고팠던 것이 있었다. 수원에 돌아가기 전에(수원에 돌아가는 날이 나의 귀국일이라고 생각했다), 현실로 귀환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마음을 정리하고팠다. 외국에서 있는 것과 국내에서 머무는 것은 의미가 다르고, 2주동안 못읽은 책도 잔뜩 시켜서 읽고, 영화도 보면서, 앞으로 뭐 먹고 살 지, 어떻게 살 지 등을 최종적으로 점검하고나서 돌아가고 싶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할 무렵 나의 컨디션이 매우 좋지 않았다. 리스본에서 하루 부득이하게 삼선슬리퍼를 신고 돌아다닌 적이 있는데(운동화가 비에 다 젖어서), 그 짝퉁 슬리퍼에 발을 다쳐서 병균에 감염되었던 거다. 그 상태로 더블린에 하루 딱 귀환해서 안좋은 컨디션으로 클래스메이트도 잠시 만나 술도 마시고(술을 마시면 안됐지만), 하우스메이트 동생이랑 간신히 저녁도 먹고 마지막으로 인사도 나누었다. 몸이 으슬으슬 너무 춥던 게 그 병균에 감염된 증상이었음을 인천의 어느 병원에서 알았다......... '봉와직염'이라는 병명도 처음 들었다. 쫄아서 의사선생님에게 "혹 파상풍은 아니죠?" 했더니 담담하게 "이 정도 깊이로 파상풍은 무리에요" 라고 딱 잘라 말씀해주셔서 얼마나 위안이 되었는지.
발이 퉁퉁부은 상태로 소독을 받고 약을 처방받았다. 정말 끔찍할 정도로 부었다. 어쩌면 장시간 비행이 더 그렇게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그 발과 컨디션으로 통영까지 가야만 했다. (집에 잠시 들러 짐 내려놓고 통영을 가는 게 더 낫지 않느냐고 조언해주셨던 더블린 어학원의 언니가 생각났다. 그 언니는 연륜으로 이런 상황을 예감하셨던 것일까...)
그래도 수원 집에 돌아가는 것만큼은 싫어서 한 선택이라 멀미약을 먹고 리무진버스를 탄 후 깊이 잠이 든 상태로 몇 시간의 이동을 무사히 마쳤다.
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멀지 않은 곳에 숙소가 있었다. 정말 주택가, 새 빌라들이 밀집되어 있었고 약을 먹기 위해 나는 편의점에서 어느 죽을 사와 그걸 먹고 잠이 들었다. 그게 내 귀국 첫 날, 통영 첫 날의 모든 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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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도 발이거니와 숙소가 편해서 어디 나가고픈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2주간의 일정 중, (너무 심한 듯 싶어 50%는 의무감에) 등산을 다녀온 것이 유일한 장기외출이었다.
중심지로는 가지도 않았고, 대부분 원룸 근방 300m안에서 해결했다. 그럼에도 너무 만족스러웠고 행복했다.
집에서 걸어 5분도 안되는 거리에 해안산책가가 있었고, 그 앞에 원룸숙박자들을 위한 각종 외식, 술집, 편의시설이 어느정도 있어 불편하지가 않았다. 터미널까지는 사실 걸어서도 20분 여 정도 거리라 그 곳으로 가보면 이마트도 있고, 이마트까지 안가더라도 동네에 아주 큰 마트가 있었는데 그 곳이 정말 저렴해서 생활 중 해먹은 요리 대부분을 그 곳 식재료를 이용했다.
거창한 목적과는 다르게 일상은 매우 단순했다. 영화를 보거나(BTV에서 해주는 프랑스 단편영화제를 섭렵했다), 책을 읽거나(귀국하자마자 시킨 알라딘 서점의 책들. 더블린에서 책이 너무 고팠어), 뭐 해먹을지 궁리해서 장봐와 조리하는 것 정도. 그런 소소한 일상을 원했었고, 통영에서 머물면서 하고팠었던 게 이런 거였지.
그동안 시차 적응을 못해서 곤란했던 적이 없었는데, 통영에서 그 고통을 처음 느껴봤다.
신기했다. 2주 내내 새벽에 깨고, 그 후 잠들지 못하고, 애매한 시간에 또 잠들고. 어디 아침에 나갈 일은 없어 다행이었지만 아침에 깨고 저녁에 잠드는 것이 스스로가 가장 건강한 생활패턴을 유지할 수 있는 최선의 규칙인데, 저렇게 엉망인 패턴으로 사니까 식사시간도 일정치 못하고 사실 조금 힘들었다. 다행히 수원 집으로 돌아가니 어떻게든 맞춰지긴 하더라만.
통영에서 하고픈 것들은 충분히 즐기고, 미래의 계획은 자연스레 어찌저찌 정리도 되었고.
자꾸 가고싶고, 또 머물고 싶은 그런 곳으로 한번 더 도장을 콱 찍은 시간이었다.
언젠가 내가 통영에 살게될 날이 올 지도 모르지 않은가. 세상 어디든 살라면 다 살 수 있다고 믿는 나이니까, 다음 정착지가 통영이 될 지, 리스본이 될 지, 아니면 미지의 도시 A가 될지도 모르고.
가족에게는 비밀로 해둔 나의 몰래 귀국 후 국내체류는 이렇게 끝이 났다.
마지막 1박은 통영이 아닌 부산에서 했다. 통영에 놀러왔던 친구가 부산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 친구 ㅎ를 만나러 하루 다녀왔다가 부산에서 수원으로 귀환했다. 이로써 여행은 끝. 현실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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