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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유럽여행기 1편 - 스위스 취리히, 고난 끝에 제대로 맛 본 행복의 극치

kimkiwiKKK 2019. 9. 27. 16:35

스위스 취리히(발음하기 어려운 Zürich)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취리히 여행'을 검색해보니 꽤 정보가 나온다. 하지만 도시 그 자체에 대한 이미지는, 여행의 핫플레이스라기 보다는 스위스의 최대 도시, 세계 금융 무역 거점으로 손꼽히는 곳, 그리고 각종 철도와 도로 항공의 요충지로 스위스에서 교통량 최대의 지역이다.
스위스 여행에 잠시 거쳐가는 의미로, 나 역시 전에 이 곳을 왔다간 경험이 있다. 물론 당일에 다른 도시로 넘어갔지.

아일랜드라는 유럽여행의 최적지에 자리잡고 나의 첫 여행이 취리히가 된 데에는 사정이 있다.
인천에서 히드로공항을 거쳐 더블린으로 입국하던 그 때, 더블린행 비행기를 놓쳐 세 시간 정도 공항에 붕 떴던 때가 있었다. 그 때 누군가 말을 걸었다. 
대뜸 나보고 "한국인이니?"라고 물었고, 나는 "어떻게 알았어?"라고 대답했다.
알고보니 한국 K-POP 문화에 아주 관심이 많은, 스위스에서 일하고 있는 이란의 청년이었다.
나도 모르는 한국 걸그룹들을 줄줄이 대는 것이 심상찮은 이 청년은, 이과 계열의 학교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러 가는 중이라고 했다. 행선지는 취리히인데, 곧 비행기 수속이 시작된다고 했다.
나는 그 사람의 케이팝 정보력에 감탄하며, "한국 케이팝이 널리 퍼졌다고는 하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라고 연신 놀라기만 했다.
헤어지기 직전에 "메신저 알려줄래?"고 물어봐서, 쿨하게 "그래!" 했는데 카톡이 있어서 또 놀람.... 카톡은 한국만 쓰는건데??

 

그러고 더블린에 정착하는 때부터 그 녀석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 때, 그 녀석이 말했다. 자기는 일때문에 더블린으로 가기가 힘든데, 혹시 스위스로 놀러와주면 자기가 다 안내해주고 가이드 해주겠다고. 

내가 왜 솔깃했을까. 카톡을 주고받았을 때, 사람이 막 저질스럽거나 아시안을 밝히는 변태는 아니라고 판단했고 오히려 나보다 더 성실한 편이라고 생각했기에, 같이 만나서 대화 나누면 영어도 늘거고 한국 문화에 밝은 친구이니 내게 친밀감을 갖기 쉬울거라고 생각했다. 그 시기에 어학원에서 서양권 친구들과 유독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내가 싫었었기에(폐쇄적인 사람으로 느껴져서) 이 친구라도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것도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다른 유럽 국가, 예를 들면 왕복 3~5만원에도 다녀올 수 있는 영국이나 프랑스, 그 근방의 다른 국가를 내버려두고, 무려 20만원 가량의 취리히 행 항공권을 끊었다.

항공권을 끊고 와주면 현지에서 밥이라던지 부가적으로 드는 비용은 다 그 녀석이 내주기로 했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고 그 비싼 항공권을 끊었다.

 

그리고 거의 매일 같이 안부를 주고 받았는데, 취리히로 떠나는 날짜가 다가올수록, 점점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커져갔다.

이 사람이 다른 목적(나랑 깊은 관계가 되려는)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 내가 같은 마음이라면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점점 이 사람와의 연락이 지루해지고, 귀찮아졌다.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과 나누는 대화 자체가 너무너무 지루했다. 매일 뭐했니, 오늘 하루 어땠니, 주고받는 근황도 거기서 거기고, 그 녀석 자체가 굉장히 단순한 패턴 속에서 반복된 일상을 사는 사람 같아 '얘 참 매일매일이 똑같네. 삭막하네'라고 생각해버리게 되었다. 직장인이라 바빠서 그랬겠지만..

대화가 취리히 호수 심연은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매번 얕은 물가의 도입부만 벅벅 긁는 느낌이었다.
오늘 친구 만났다, 너는 뭐했니, 나는 회사 갔다와서 밥 먹었다, 지금 뭐하니, 영화본다..
이런 느낌?
내가 사랑하는 영화 '비포 선셋'과 같은 통통튀는 대화까지는 못가더라도, 서서히라도 좀 더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고팠다.
얘를 만나러 내가 학교까지 빼고 취리히를 가야할까? 항공료가 이제와서 너무 아깝다, 하지만 저가항공이라 캔슬은 할 수 없고.....

 

결국 여름 어느 날, 취리히로 떠났다. 오전 이른 비행기라, 새벽부터 일어나 부지런히 준비하면서도, '가기 싫다'라는 마음이 제일 먼저 들었다. 그리고 취리히 공항에서 그 녀석과 재회 했다. 히드로 공항 이후 두번째 만남. 

예감은 적중했다. 그 녀석의 동네는 취리히에서 근교로 약 20분 가까이 기차를 타고 가면 나오는 조용한 마을 '바덴(Baden)'.
동네는 정말 고요하고, 아름답고, 부유한 동네라 그런지 더블린 집의 동네와는 다르게 안정감이 있고 깨끗했다. 
오히려 취리히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보다 바덴을 거니는 것이 더 운치있고 유럽마을의 평화로움을 온 몸으로 흡수하는 기분이 들어 상쾌했다.

문제는 그 녀석. 치근덕대는 것은 내가 그 녀석에게 호감이 생기지 않아 느끼는 감정이고, 이와는 별개로 우리 둘 주변을 감도는 그 지루함. 대화가 치고 감는 맛이 없었다. 전혀. 영어는 그 녀석이 훨씬 더 잘 구사하는데, 내가 오히려 대화를 주도해야하고, 열심히 질문을 하고 대화를 해보려하도 대답이 영 시원찮았다. 

여기저기 동네도 보여주고, 현지인도 아니지만 아는 한도 내에서 설명도 해주려 하고 그런 부분에서는 성의가 느껴지지만, 그 외에는.... 나에게 관심이 있는걸까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대화에 성의가 없었다. 다른 친구들한테도 이렇게 하나? 그래서 주말이나 평일 퇴근 후에 만날 사람 하나 없이 혼자 방에서 영화만 보는 걸까? 원래 이런 성격인가? 별 생각이 다들고 나중에는 조금 화가 났다. 

몇 달을 그 아기자기한 동네에서 살았는데, 근방에 아는 식당(혹은 내가 오면 가야겠다 생각이라도 해둔 곳) 하나도 없어서 초행인 내가 레스토랑을 골라야 했고, 음식도 엄청 빨리 흡입하더니 'Finish' 라는 포스로 가만히 앉아있는 그.
우리가 무슨 근무 중 점심시간에 구내식당에서 밥 떄려넣고 일하러 가자, 이런 거 아니잖아?
오늘 너 휴무이고, 너도 날 위해 금요일 스케쥴까지 빼놓았고, 하루종일 바덴 동네 구경하는 거 말고 바쁜 일도 없잖아?

 

공개적인 장소에서 누군가를 나쁘게 얘기하거나, 비난하고 싶지 않았는데 글을 쓰면서 회상하다보니 다시 화가 났나봐.

섣불리 취리히 행 항공권을 끊은 나를 탓해야지 뭐.... 마음이 맞는지, 취향이 맞는지, 서로에게 매력을 느끼는 지 고려도 안한 상태에서 무작정 실행에 옮긴 '성격 급한 나'를 탓할 뿐. 그래서 더 화가 나네...

그 녀석이 나쁜 게 아니다. 누군가에게 그 사람은 성실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좋은 남자일 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그런 친구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여행을 즐기고, 대화가 잘 맞고, 어느정도 감성도 통하는 그런 친구를 필요로 했을 뿐이라고.
음식 취향까지 맞지 않아서(그 녀석에게 취향이 있는 지조차 의문), 점심은 동네 뷔페로, 저녁은 케밥 레스토랑에서 피자를 먹어야만 했다. 음식도 여행도 책도 즐기지 않아 나는 기권의 흰 수건을 링으로 던졌다.

 

다음날 아침, 그 녀석에게서 떠났다.

나는 원래 누군가와 언쟁하거나, 담판을 짓는 것에 취약해서 말 없이 떠났다. 이게 잘못된 방식이란 거 아는데, 그 녀석 잘못이 아닌 일로 떠나는 데 뭐라고 하기도 뭐하고.. 그 과정이 괴롭고..

새벽의 바덴은 고요했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 어슴푸레 드러나는 마을의 형태와 어렴풋이 기억나는 길을 터덜터덜 돌아나가야 했다.

우스운 것은, 죄 지은 것도 아닌데, 헤어지는 그 어색함이 싫어서 빠져나온다는 것이, 유일한 바지를 숙소에 두고나와버려서, 수면바지 차림으로 취리히까지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봉착했다는 거다.
지금 생각해봐도 너무 웃기다. 그 상태로 아침 일찍 문 여는 옷가게에 들어가, 그 와중에도 마음에 안드는 옷은 사기싫다고 옷을 고르고 고르던 그 모습. 남들이 보면 뭐라 했을까? 결국 자라 매장에서 가격대가 낮지 않지만 마음에 들던 청바지를 하나 골랐다. 가격이 무려 50프랑은 했을거다. (그 당시 환율로 7만원 정도?)

그리고 그 소중한 바지는, 수많은 자라 청바지를 시착하고 비교해서 고른 그 청바지는 아직도 잘 입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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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이런 식이었다.

남녀관계에 있어서는 특히.  '이 사람은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야', '나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만나야 해?', '차라리 혼자 있는 게 더 유익하겠다' , '외롭다고 아무나 만나고 싶다는 건 아냐' 라면서 매번 이런 식으로 시작도 채 하기도 전에 전부 단절해 버리는 사람.

이번에도 그런 식으로 끝나버린 거다. 내가 너무 이상적인 만남을 꿈꾸는건가? 내 주제에 뭘 더 바라나? 이런 생각이 들다가도, 그 지겨운 시간을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견뎌야 하는가에 대한 선택의 순간이 오면, 내달려버린다. 몇 번이고 경험했었어.

항상 끊어버리고 도망갔다. 그 중에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서 나중에 후회한 경험도 있었다. 어쩌면 나는 '사랑에 불타오르는 열정적인 타입'이 아닌 걸지도, 근본적으로 냉담한 내가 문제인 걸수도 있는데...

 

새 자라 청바지를 입고 나니, 새로운 문제가 발견되었다.

그 녀석에게 첫 날을 의존하느라, 나 자신은 유심칩조차도 사지 않았던 거다. (공항에서, "나 유심칩 사야하는 거 아냐?" 했을 때, "아니, 내가 있으니까 필요없을걸"이라고 했을 때, 단호히 유심칩을 사넣었어야 했나)

그 녀석으로부터 도망나온 날은 마침 토요일. 축제일. 그 어떤 시내의 유심칩가게도 문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스위스는 매우매우 철저하고 엄격한 나라라, 아주 작은 가게라 할 지라도 와이파이를 자유로이 쓰게 해주지 않았다. 정말 그 어떤 곳도 말이다. 카페도, 식당도.... 뭔가 지불하지 않으면 와이파이는 말도 꺼낼 수 없고, 패스트푸드점이나 스벅 근처에 가면 와이파이를 잠시라도 쓸 수 있지 않을까 했지만 하루종일 헛수고만 해야 했다.

그 날을 '와이파이의 대란'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공공기관도, 대중교통도 와이파이는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었다. 그게 사실 원칙적으로는 당연한거지, 무선인터넷도 어찌보면 가게의 무형 재산이니까, 하지만 간절했던 나는 '이 찔러도 피 한방울 안나오는 스위스놈들'이라고 생각해버렸지..

나는 2박3일로 다음날 더블린행 항공기를 예약해두어서, 하루 묵을 숙소가 일단 필요했다.

에어비앤비로 전날 밤에 미리 예약을 해두어서 다행이지만, 에어비앤비로부터 체크인 관련 확인할 사항이나(키패드 비번) 가는 경로 등을 실시간으로 볼 수가 없어 미칠 지경. 어쩔 수 없이 아일랜드에서 쓰던 쓰리 유심의 데이터를 써야만 했다. (더블린에서는 두 달을 쓸 분량의 데이터를, 스위스에서 반나절 만에 다 써버렸다. 피같은 20유로치 데이터. 이 정도 금액이면 공항에서 유심칩을 샀으면 편하게 여행이나 했지)

그 와중에 시내 구경도 하고, 맑은 호수와 사방이 온통 시계로 둘러싸여 정각마다 울려퍼지는 그 정확한 알림에 감탄하며(역시 지독하게 정확한 놈들) 축제까지 즐길 수 있었다. 그 날 마침 축제라 시내에 사람이 어마어마했다. (이런 축제를 두고 그 녀석은 인터라켄을 가자고 했다. 심지어 내가 이전에 배낭여행으로 다녀왔다고 했는데도 말이야)

축제는 흥미로웠고, 하지만 나는 에어비앤비에 체크인 하는 것이 문제였다. 도중에 쓰리 유심 데이터가 끊겼기 때문에 온갖 고초를 겪은 후에야 그 동네까지 찾아갔지만, 문제는 내 호실을 찾는 게 어려워서(그 곳은 건물들이 밀집한 신식 원룸촌같은 곳, 한국으로 치면 오피스텔 몇 동이 아파트처럼 동을 이루며 모여있는 곳) 지나가던 아저씨한테도 물어보고나서야(마침 그 아저씨도 에어비앤비의 청소를 담당하시던 분이셨다) 내 방이 있는 건물까지는 도달했다. 건물까지만.
메일에 도착했을 입구 패스워드를 몰라서 헤매다가 어찌저찌 들어는 갔는데, 방 패스워드가 맞지 않았다. 유심이 끊겨 집주인에 전화도 할 수 없었다. 마침 밑의 층에 프랑스 남자가 나처럼 에어비앤비로 체크인 하는 것을 보게 되었고, 정말로 곤란한 처지였던 나는 그에게 부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전화를 써서 집주인에 전화를 하니, 패스워드에 문제가 있다면서 원격으로 새 패스워드를 만들어 주었다. 이건 내 실수가 아니라 그 쪽의 문제였던 거다... 전화를 끊고 프랑스 남자에게, 나 때문에 국제전화비가 많이 나왔을테니 돈으로 주겠다, 얼마나 줄까, 했더니. 건네 받은 핸드폰을 연신 닦으면서(내 개기름이 폰에 묻었을까봐 그랬나보네.......) 얼마인지 정확히 모르기도 하니 됐다. 아까까지는 전화 길게 하지 말라고, 자기도 로밍 중이라고 하더니 갑자기 왜 이런 친절을.. 이라고 생각했다.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이따 별일 없으면 같이 밥먹으러 가도 되고, 시내에 축제 보러 나갈건데 일 없으면 같이 가자는 거. 막 적극적으로 들이대진 않고, 자기는 방에 있을 테니 필요하면 찾아오라는 식이었다. 나 방금 어떤 놈 하나를 간신히 떼 놓고, 덤으로 내 청바지까지 잃어버렸는데 널 또 만나 '혼자보다 힘든 둘의 어색한 시간'을 또 견뎌야 하는 거니 싶어, "그래 알았어. 좋은 하루 보내" 라고 말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정말정말 피곤했고, 왠지 울적했는데 모르는 남자를 또 만나서 "너는 뭐하는 사람이니", "출장이라고 말했었는데 무슨 일 하고 있니", "뭐 먹고 싶니" 등등의 과정으로 감정소모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혼자 있고 싶었다. 그 때 전화 쓴 거는 정말 미안... 방에 있는 와인이라도 주고 싶었는데, 그건 꽤 비싸게 주고 산 거라 줄 수 없었어...

다행히 급히 잡은 방은, 공항에서 멀지 않은 외곽의 고요한 동네에 자리한 아주아주 깨끗한 방이었다. 사용감도 거의 없고, 전부 빌트인에다가, 방에서 요리만 할 수 없을 뿐이지 식기류도 다 갖춰지고 호텔처럼 잘 정리되어 있었다. 십여만 원에 결제했는데, 당시 축제기간이고 스위스 물가를 생각하면 정말 저렴하게 잘 예약한 것이 분명했다.

시간이 늦어 동네 가게들은 다 문닫고, 근방에 마트를 잠시 다녀왔다가 먹을 것이 없어서, 찾아둔 중국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유럽 어느동네든 중국식당은 닫아있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 나보다 일찍 일어나 문 열고 나 귀가하기 전까지는 닫지 않는 부지런한 중국인들. 역시 그 가게만큼은 문 열어있었다. (저녁 6~7시 정도였는데 마트도 다 문닫는다고 나가라고 했었던 기억이 난다. 주말이라 그렇다)

중국식당은 맛도 괜찮고, 테이크아웃이 용이하고, 일단 저렴하다. 그래서 볶음면과 야채 만두류를 포장했고, 직원은 친절하게 말도 걸어주고 덕분에 마음을 추스리는 데 도움을 받았다.

그 동네에서 티비로 페스티벌 중계를 보고, 방에서 중국음식을 먹고, 와인을 마시며 쉬었다. 마음도 평온해졌다.

 

다음 날, 공항으로 가기에 용이한 위치였음에도 체크아웃 후 취리히 시내로 다시 나갔다.

시내는 축제의 끝이라면 늘 그렇듯, 전날의 온갖 알콜과 광란의 파티의 흔적으로 앓고 있었다. 평소 스위스의 어마어마하게 깨끗한 도로만 봐와서 생소했다. 축제에는 스위스도 장사 없구나, 싶었지.
그리고 그 날, 말 그대로 "가만히 있어도 전해져오는 행복"을 오랜 시간 느꼈다.
여행하면 흔히,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라고 단순히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시간이 더 많기도 하다. 피곤하거나, 뭔가 문제가 생겨 짜증이 나거나, 지쳐 돌아가고 싶거나 하는 경우도 많고, 처음에는 흥분하다가도 어느 새 익숙해져서 덤덤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날의 취리히는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행복"을 스위스답게 "100퍼센트 확신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난 그저 축제 후의 조용한 거리를 거닐었을 뿐이고, 우연히 호숫가의 노천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셨을 뿐이고, 그 곳은 한국에서 흔히 쳐주는 '인스타 감성'이라던가 '로컬의 유명한 가게'일리도 만무했고, 그저 어느 작은 3성급 정도의 숙소의 일층에 딸린 카페 겸 레스토랑 이었을 뿐. 직원이 굉장히 친절한 것도 아니고(스위스인 것을 잊지마라. 그는 직무로서 요구된 만큼의 적당한 친절과 서빙을 해주었을 뿐) 커피가 유독 미칠 듯이 맛있었던 것도 아니다. 일반적인 카페, 적당한 정도의 가격, 적당한 서비스였는데 그 시간이 어쩌면 내 인생에 유일한 '온전한 행복의 최대치'를 경험했던 순간일 지도 모른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 때 읽었던 '키다리 아저씨'라는, 한국에서 들고온 더클래식 미니북이 재밌었던 것도 영향이 있고, 그 카페는 너무 붐비지도 않고 너무 휑하지도 않아 오래 앉아 경치를 즐기기에 적합했던 것도 영향을 주었을 거다. 그 곳에서 맑디 맑고 푸르디 푸른 취리히 호수 한 켠을 점거하고 군중 속의 고독을 즐겼다. 그 책에 푹 빠졌고, 기분이 좋은 나머지, 비싼 스위스 물가에도 아이스크림을 추가로 주문하고, 그 아름다운 데코레이션에 감탄하며 '적당히 친절했던' 웨이터 아저씨에게 팁도 드리고 나올 수 있었다.

지금도 믿을 수 없는 짜릿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다시한번 절실히 느꼈다.
나는 마음이 동하지 않는 사람과 '그래도 혼자보단 낫겠지'하며 함께 하느니, 
차라리 나 혼자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먹고 싶은 거 먹고, 체류하고 싶은 장소에 앉아있는 것이 훨씬 행복하다고.
이전에는 혼자 남아도 결국 외로워져서, 내 선택이 잘못되었나 반성하고 자책했었다면 취리히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분명히 전달받은 행복이 정답이라고, 내가 그 녀석을 떠나서 혼자가 된 건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답을 받았다.

내가 좋아하는 뮤지컬 '레베카'의 넘버(OST) 중 '행복을 병 속에 담는 법'이라는 곡이 있다.
나는 그 날, 그 시간을 병에 담고 싶다.
마음에는 이미 담았지만, 가능하다면 병에 담아 진열장 제일 좋은 자리에 놓고 싶은 마음이다.

이 때를 계기로 확실하게 행동에, 사람 만나는 것에 조심하기로 결심했다.
마지막 날에 강가에서 또 어떤 이상한 놈이 말 걸면서, 변태처럼 굴길래 단호하게 잘라냈다. 유럽에는 아시안 여성을 쉽게 보고 접근하는 '옐로우 피버' 변태들이 득실댄다. 조심해야 해.
변태와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내느니, 혼자서 맨 빵에 와인이나 병째 들이키면서 강을 바라보는 게 훨씬 유익하다.

다시한번 말하자면, 나는 똥손이다. '바덴'은 이 사진보다 더 동화같은 마을이었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이 동네에 묵을 수 있었던 점은 행운이었다. 저 강물은 마셔도 무해할 거라고 내 직감이 강하게 외치고 있다. 정말 맑아. 더블린 리피강과는 차원이 다른....(미안...)
혼자가 된 후, 오전부터 맨 빵에 와인. 맨 빵외엔 너무나도 비싸기도 하거니와, 사실 나는 진심으로 맨 빵을 좋아한다. 딱딱한, 달지 않은 기본 빵!  그리고 축제 준비로 한창이던 시내. 들뜬 사람들. 이 축제를 위해 취리히까지 온 수 많은 외부인들.
영화를 야외상영 한다는 광고. 이 날하는 영화가 무려 '다키스트 아워'. 하는 영화가 내 취향 저격이었는데 난 에어비앤비로 돌아가야했다.
2일차 고초를 겪고 무사히 숙소에서 페스티벌 감상 중. 내가 시내에 있던 시간에도 페스티벌 준비로 주변이 분주했었다. 그리고 다들 들떠있었다. 
빌트인 오피스텔 스타일의 내부인데, 아파트 촌 같기도 하고, 원주민(?)보다는 에어비앤비 사업으로 쓰이는 곳 같기도 했다. 2층이었는데 밖은 아무도 쓰지않는 조용한 놀이터여서 좋았다. 그리고 지금 사진보니 기억난건데, 아무도 쓰지않은 깨끗한 주방이 따로 아래층에 있었다!
마트 완조리식품인데 비싸다. 인스턴트인데도 비싸다. 하나 먹었는데 맛은 좋았다. 스위스 외식 물가는 정말이지 후덜덜이라 저걸 점심으로 먹었다.
노천카페. 충만한 행복감에 몸서리치던 그 시간, 내가 바라보던 뷰. 저 시간, 저 사진속의 뷰를 내가 잠시 소유하고 있었다. 커피도 부드럽고 입가심용 빵도 감사하고, 행복을 연장하고싶어 추가 주문한 초콜릿 아이스크림은 나를 '견딜 수 없는 행복의 극치'로 내달리게 했다.
예쁜 소품샵, 리빙용품샵이 너무 많은데 일요일이라 아무데도 열지 않았던.... 너무 아쉬운 점이다.  스위스 초콜릿도 일단 찍어둠. 그리고 최소한의 선물만 사갔다. 나도 먹고 싶었는데.... 다행히 집주인 부부에 드렸던 술 들어간 고급 초콜릿을 한 조각 맛볼 수 있도록 해주셨다!
취리히공항 레스토랑에서 먹었는데, 말도 안되게 맛있었다. 순수하게 맛있는 아기용 파스타 맛. 또 행복.. 남은 프랑 탈탈 털어 팁으로.
드디어 더블린으로 돌아갈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