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린이 세상 최고의 낙원은 아니다.
살면서 권태기를 느끼고 '왜 내가 이 곳에 와 있을까?' 싶어 강가에서 배회하던 시기도 있었다.
(청명한 취리히의 정취에 젖은 채로 본 더블린의 리피강이 슬퍼서..)
주관적으로야 애정도 많고, 누군가 아일랜드를 욕하는 것을 들으면 분개할 나이지만,
객관적으로 유럽뽕이 들어갈대로 들어간 사람이라면, 1순위로 선택할 장소는 아니라는 게 나의 의견이다.
전에도 언급했듯이, 살다보면 '여기가 한국인가? 유럽인가?' 싶을 때가 많았다.
그리고 다른 외국으로 여행나갔을 때 만난 외국인들에게 "나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6개월 살다가 지금 여행하고 있어" 라고 말했을 때 그들의 반응은 대개,
"아아... 더블린.. 그렇구나" 혹은 "음.. 더블린 좋은 곳이지..."
이런 식이었다.
그 반응을 내가 자체적으로 해석한다면, "왜 굳이?", "하고 많은 나라 중에 왜?" 였다.
해석을 잘못한거라면 그들의 반응을 곡해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지만.. 내가 정확하게 해석한 것이 맞을 가능성이 더 크다.
더블린, 아일랜드가 서양권에서 어떤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건지 진심으로 궁금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주변의 반응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아일랜드를 좋아하고 사랑한다.
그 곳에서 받은 사랑, 사람, 축복받았던 평화의 시간 등등.
그래서인지 한국에 와서 나도 모르게 그 때의 흔적들을 찾으면 심장이 쿵. 이성보다 감정이 앞선다.
그 흔적이라는 게....... 조금 우습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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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에서 기네스 맥주를 보면, 속된 말로 환장한다.
아일랜드에 가기 전에는 손도 안대던 맥주 종류 중 하나였을 뿐인데, 이제는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내가 고르는 맥주 네 캔 중 한 캔은 반드시 기네스가 된다.
호프집에서도 마찬가지. 카스나 하이트를 골라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내 선택은 기네스 쪽으로 상당히 치우쳐져 있다.
정작 아일랜드에서 펍에 가도 기네스를 간택한 비율은 채 30%가 되지 않을 것인데도 말야.
이케아를 가는 순간, 나는 이미 오코넬 브릿지의 중심으로 소환된다.
쉐어하우스 내부를 되짚어보자. 그래, 일단 내 방부터.
기본적으로 제공되었던 새하얀 침구, 쿠션, 대형 러그, 거울, 전신거울, 선반, 부분조명.
거기에 내가 추가로 사다 쓴 은은한 핑크 무늬의 하얀 침구, 현란한 빨래보관함도 이케아로부터.
새로 사다주신 라탄 의자도 이케아. (집주인 부부가 이케아를 즐겨가던 모습을 보자면) 아마 내가 모르지만 침대나 선반 등 소품들도 이케아에서 옮겨온 아이들일 가능성이 높다.
주방은 이케아 쇼룸을 방불케 한다.
기본적인 식기류 일체를 집주인이 제공해주셨는데, 접시 하나하나 컵들, 조리도구들 등등.
그래서 내가 이케아에서 식기류 코너를 가면 걸음을 뗄 수가 없나보다.
별 거 아닌 투명 유리컵만 봐도, "저 컵, 내가 매일 우유 마시던 그 컵이잖아!",
심플한 접시 하나에도, "저 접시는 내가 매일 토스트 담아서 방으로 가지고 들어갔던 그 최애 접시야!",
포크만 봐도, "이 포크는 내가 숏 파스타 찍어먹던 그 포크!".
이제는 더블린을 느끼고 싶다면, 이케아로 가는 것만으로도 대리만족이 될 것 같은 기분.
스콘과 홍차 구성이 있는 카페만 보면 콩닥콩닥.
원조가 영국인지, 어떤지는 제쳐두고 그런 거 상관없이 '아일랜드'스러워서 정말 반갑다.
이젠 내가 홍차 맛을 좋아하는 건지, 사실은 그렇지 않으면서 홍차를 마시던 작년 더블린에서의 나와 교차점을 만들어 보려는 건지 알 수 없다.
커피 대신 홍차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더블린 아늑한 내 다락방에서 토스트와 함께 홍차를 홀짝이며 통학준비를 하던 2018년의 나로 돌아간다.
어느 방송을 보다가 아일랜드가 나오면 반색하고,
미국 토크쇼에서 아이리쉬를 희화하하며 개그소재로 쓰면 왠지 발끈하고
해리포터 영화에서 론과 그 가족을 보면 왠지 신기하고 반가워.
미래의 내 보금자리 인테리어를 상상할때면, 점점 그 구상이 더블린의 내 방과 주방을 통째로 옮겨오는 것과 뭐가 다른 지 궁금해진다.
그 주방 테이블을 그대로 놓고 싶고, 보관함을, 위로 올려 여는 독특한 다락방의 창문스타일, 건물 없이 오롯이 하늘과 구름만 걸리는 창문 뷰, 그 뷰를 바라볼 수 있는 침대배치, 고전적인 거울과 그 아래 심플한 선반, 새하얀 백열전등 대신 노오란 부분조명, 러그, 페이크 벽난로, 작은 창고까지...
그 집의 일부를 새로운 보금자리에 재현하려고 하는 날 보며, 어학연수로 얻을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영어실력 향상이라던지 여행경험 뿐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의미에서 그 시간이 내 피와 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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