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에 대한 미묘한 반발심과 함께, 그래도 아일랜드 있는 동안에 한 번쯤은 경험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 적을 알려면 적진에도 잠입해봐야지(?)"
언젠가부터 내 적군이 되었던지, 나는 잉글랜드를 잠입하기 위한 항공편을 예약했다.
아일랜드와 잉글랜드는 한국과 일본처럼 매우 가깝고도 먼 사이이다.
고로 항공료도 그에 준하여 매우매우 저렴하다.
내가 같은 아일랜드 내의 코크나 골웨이 가는 정도의 편도 금액(대략 20유로 정도) 정도로 영국을 왕복할 수도 있다. 런던의 경우에는 나의 여정에는 고작 왕복 35유로를 청구받았을 뿐이다. 국내 도시보다 저렴한 런던행 항공권이라니.
(물론 라이언에어를 탈 경우에만 해당함)
다만 그 외의 물가는 비싼 편이기에, 숙소는 불가피하게 유스호스텔의 도미토리룸으로 예약해야만 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도미토리룸은 피하게 되었는데, 어쩔 수 없이 (다음 여행을 위해) 참기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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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빠르게 얘기하자면,
런던은 독보적인 도시로 기억한다.
무엇이 독보적이냐 하면, '여행 내내, 일분일초 빼놓지 않고 전 일정 내내' 나를 설레게 하고 심장뛰게 한 유일한 도시로.
과장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루하루 설레는 마음을 감출 곳이 없어 힘들 정도였으니.
그 원인을 짚어보자면, 나는 일단 대도시를 사랑한다.
서울을 동경해왔던 것처럼, 모든 대도시를 동경한다. 그래서 더블린에서 런던으로 왔을 때 그 규모와, 다양한 선택지(음식점이든 번화가든), 다양한 군상의 사람들, 인종, 묘하게 다른 도시의 느낌, 차가운 모노톤의 시크함, 공기...
숙소에 체크인 후 나와(숙소는 솔직히 그저그랬다), 천천히 걸어 번화가로 걸어갔다.
같은 브랜드이지만 이 곳 런던은 규모도 으리으리하고 압도적이다. 못보던 옷가게들이 즐비하고, 어딜 들어가도 익명성이 보장되는 '적당한 규모의' 인구밀도, 런던에서만 볼 수 있는 체인음식점, 밖에서 보기만 해도 즐거운 각종 숍들.
걷기만 해도 도시의 활력이 몸에 깃드는 기분이 들었다.
저렴한 패스트푸드점(건강에 나쁘지는 않지만) LEON에서 간단히 요기한 후, 뮤지컬을 예매할 수 있는 TKTS로 이동했다.
이미 꽤 어둑해질 시간이었으나, 매일 한 편의 뮤지컬을 보는 것을 이번 여행의 목적으로 정한 터였다.
내가 고백한 적이 있던가? 한국에 살 적 나는 열광적인 뮤지컬-연극의 팬이었다.
(월급의 대부분을 인터파크 투어에 고대로 갖다바치던 삶을 산 적이 있다고는 고백했던가?)
그 날 현장구매로, 평소 좋아하던 작품이기도 했고, 할인도 챙길 수 있었던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예매했다.
그 후 소호거리로 가서 대만식 만두전문점 '바오'에서 어마어마하게 맛있고 행복 가득한 번과 맥주를 만끽했고, 그 여운을 뮤지컬 공연장으로 가져가서 최고점을 찍고야 말았다.
실제로 나는 런던 체류의 3박4일 중 세 번의 뮤지컬을 관람했는데, 이 날 보았던 레미제라블이 내 취향상 가장 훌륭했다.
공연 후, (한국에서 가끔 이런 적 있지만) 흥을 주체하지 못해, 이어폰도 없는 처치에 아주 작게 유튜브로 레미제라블 넘버를 틀어 들으며 맥주 한 캔 사서 숙소로 돌아갔다. 돌아갔다, 고 표현하기 보다는 거의 춤추듯 뛰어댕겼다, 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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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신나게 가방을 챙겨 외출.
이 날부터는 오전 10시에 오픈하는 데이시트라는, 당일 선착순으로 공연장 앞에 줄서면 20파운드의 저렴한 가격으로 티켓을 구매할 수 있게 해주는 (노력과 시간 대신 받는) 특가티켓을 구매할 요량이었다.
성수기가 아닌 기간인지라 두시간 여 전에 도착하면, 그럭저럭 좋은 티켓을 받아낼 수 있다고 들었고 실제로 내 앞에는 한국인 관광객 대여섯 명 정도 서있었을 뿐. (어느 날에는 오전6시부터 기다렸다던 외국인 무리도 보긴 했다)
두시간은 정말 지루했지만, 티켓은 정말로 20파운드만 내면 되었고, 한국에서 S도 아닌 A석이라도 20파운드(3만원)로 대형뮤지컬은 택도 없을 것이기에 열심히 시간을 보냈다.
티켓을 받고 나서는 시내를 걸어다니며 런던을 눈에 담았다.
서점도 들어가보고, 마트도, 브릿지 근처 템즈강, 대 전날 봐둔 독특한 독립서점, 카페, 시장 내의 마켓..
가면 갈 수록 더 빠져드는 런던의 매력이라....
점점 파운드를 지불해야하는 부담감은 줄어들고, '더블린 가서 아껴쓰지 뭐' 모드로 바뀌고 있었다.
런던은 돈이 많으면 정말 행복한 도시(어디든 안그러겠냐마는)였다.
사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다양한 숍들은 '여기 아니면 못살 거 같은' 물건들을 구비해놓고 있었고, 나는 자주 내 머릿 속 가계부를 열심히 두드려봐야 했다.
내가 행복해하는 요소가 런던 각 곳에 즐비했다.
개성 넘치는 카페와 맛 좋은 커피들, 자꾸만 손이 가는 다양한 빵, 서점 내의 소유욕을 자극하는 책과 굿즈들, 패스트푸드점으로 보이지만 왠지 특별해보이는 음식들까지... 유행을 선도하고 있다고 보이는게, 패스트푸드점들이 맥도날드나 KFC가 아니라 건강에 신경쓴 샐러드나 부리또, 초밥도시락 등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게다가 마켓은 동네마다 왜 이리도 많이 열리는지...
모든 마켓을 다 돌아다니려면 열흘은 걸릴 듯 하여 가고 싶은 곳만 찝었는데, 캄덴마켓이 특히 내 취향이었다.
마치 홍대와도 같은 인구밀도와 젊은 에너지를 갖춘 거리를 거닐다보면 마켓이 보이는데 그 규모며, 물이 흐르는 내부 구조며, 분위기, 다양한 푸드트럭 등등 하루종일 그 곳에만 있어도 행복한 장소였다.
거기서 먹은 남아프리카 음식은 또 어찌나 새롭고 맛있던지.......
서울에 또 팔면 버스로 한 시간 넘게 걸리더라도 먹으러 갈 수 있을 정도였다.
(푸드트럭이 종류별로 많아서 굉장히 신중하게 골랐고, 그래서 맛을 보았을 때 더 뿌듯했다)
둘째 날 저녁은 오페라의 유령을 보았고, 팬텀의 살짝 아쉬운 가창력만 제외하면 충분히 볼 만한 가치의 공연이었다.
너무나도 호화로운 공연장에, 20파운드만 내고 들어와있는 스스로에 황송스러울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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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날 아침도 데이시트로 부지런히 시작. 이 날은 라이온킹을 보았다.
새로운 경험 가득한 하루를 보냈다.
날씨가 좋지 않다는 점은 내게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비를 뚫고 동네 서점도 보고, 노팅힐도 다녀왔다.
노팅힐의 그 서점도 다녀왔고, 시내로 돌아와 실수로 '비건용 샌드위치'를 사먹었으나 이 또한 신기한 경험 중 하나라 만족했음은 물론이다.
뮤지컬 관람 전 저녁으로는 유명 수제햄버거 체인점에서 비싸지만 힙한 저녁을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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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날은 데이시트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침에 숙소 근처의 아기자기한 카페에서 (내 최애 빵인) 시나몬롤과 라떼를 맛보았고, 그 카페에서 발행하는 잡지를 한 권 샀다. (나중에 한국오니 그 잡지 팔더라는.. 심지어 그 잡지는 일본계인 듯)
또 어느 동네로 흘러가서 게이전문서점을 방문했고, 하루종일 너무 걸어서 힘든지라 그 옆에 있는 아무 카페나 들어갔는데 여기는 또 어쩜 이렇게 감각적인 곳인지... 아마 한국에 있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인스타로 퍼날랐을 곳. 쿠키도 맛있고 커피도 기가 막히고, 공간도 코가 막히고. 너무나도 안락해서 호스텔 대신 그 곳에 묵고 싶을 정도.
그 카페에 오래 머무느라 대영박물관을 시찰하겠다는(아직도 적의를 버리지 못했던가?) 계획을 많이 수정했다.
물론 들어가긴 했는데, 초반부의 몇 곳만 보고, '이 놈들이 전리품들을 이렇게 호화롭게 보관한단 말야?' 라고 살짝 분개하면서 '그래도 런던은 참 즐거웠지'라고 혼돈 속에서 '절대 기념품만은 여기에서 안사겠어!'라고 다짐하며 공항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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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감상이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이보다 더 황홀하고 충만한 행복의 도가니는 여태 경험해보지 못했다.
도시가 주는 풍요, 문화의 다양함, 익명성이 주는 편안함 등 내게 맞춤 도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
내가 지금 관광객으로 한국에서 번 돈을 가져왔으니 물가가 비싸다고 느꼈지, 런던에서 돈 벌면서 산다면 충분히 살 수도 있겠다는 계산도 끝낸 걸 보니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고 생각해도 무리는 없겠네.
"런던을 왜 더블린 생활 막바지에야 꾸역꾸역 밀려 다녀왔을까" 싶은 아쉬움과, "그래도 다녀오기라도 해서 정말 다행이다", 라는 마음이 반반인 여행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하, 다량의 사진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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