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말정말 좋아하는 사랑 영화를 꼽는다면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비포 선라이즈'.
풋풋하고 싱그러운 어린 사랑의 저돌적인 여행지에서의 사랑이야기.
비엔나로 향하던 열차 안에서 우연히 말을 건네고, 눈빛을 교환하고, 그러다가 남자주인공 제시가 용기있게 대쉬. 그보다 더 용기있는 여자주인공 셀린느는 그를 따라서 목적지도 아닌 비엔나에서 그를 따라 내린다.
치기어리다고 볼 수도 있지만, 솔직히 부러운 마음이 훨씬 더 컸다.
나도 머리가 아닌 심장으로, 여자와 남자의 본능적인 이끌림으로 행선지를 바꾸고, 낯선 이와 함께 비좁은 음악감상실에서 묘한 기류를 주고받으며, 돈이 없어 구걸에 가깝다시피 와인을 얻어내 함께 마시는 풋내기 사랑.
하지만 내가 더 좋아하는 영화는 그 다음 시리즈인 '비포 선셋'이다.
이미 성인으로서 사회에서도 각자 역할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고, 심지어 제시는 결혼해 아이까지 있는 중년의 작가.
셀린느는 선라이즈의 총명스러움에 잘 어울리는 사회적인 활동가로, 멋진 여성이 되어 있다.
그 둘이 파리에서 조우한다. 셀린느와의 풋풋한 러브스토리를 책에 써낸 제시의 '독자와의 만남'에 셀린느가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그 둘은 파리 곳곳을 거닐며, 대화하고 또 대화한다.
처음에는 그저 대화를 쏟아내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그들의 대화가 '교감'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어릴 적부터 무뚝뚝한 남자를 좋아했고, 말수가 적은 점이 호감 요소의 큰 비중을 차지했다.
만화나 영화에 나오는 과묵한 남자, 말이 없는 사람이 진정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깊은 속내를 감추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굳게 믿어 매력적이라고 여겼다.
이 영화를 보며, 그런 나의 생각을 완전히 뒤바꿨다.
둘은 사랑의 수단으로 대화를 사용했는데, (둘 다 말주변이 상당한 사람이기도 했거니와) 합이 잘 맞는 핑퐁게임을 보는 듯도 하면서 점점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나도 저렇게 활력적으로 대화를 하며 사랑을 해보고 싶다, 하필 영화의 배경이 오스트리아(비엔나), 즉 유럽이었기에 혹시 나에게도 아일랜드에서 저런 로맨틱한 사랑이 찾아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어떤 이에게는 찾아오기도 한다.
실제로 보았다. 보기만해도 꿀 떨어지는 관계, 전혀 다른 두 나라에서 와서 만나, 언어는 완벽하게 통하지 않더라도 마음이 통했기에 이루어진 결실.
나중에 이야기 듣기로는, 여자가 본국으로 돌아간 뒤(일본인) 남자(아일랜드에 정착하려던 프랑스인)는 여자를 따라가기 위해 준비 중이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살면서 느낀 점은,
한국에서 사랑하기 힘든 어떤 문제를 안고 있던 사람은, 아일랜드가 아니라 프라하라도, 파리의 상젤리제 거리에서도 원하는 사랑을 쟁취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 것은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따라서 모두에게 100% 적용되는 건 아니라는 점을 밝혀둔다.
나는 자주 의심한다.
'네가 날 좋아한다고? 언제 봤다고?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저 외롭거나, 여자가 필요한 거 아냐?'
이런 식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의심한다.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에 있어 서툴다. 마음이 서툴어서 방법도 서툰 걸지도 모르고.
이런 내가 더블린에 떨어진다고, 'LOVESTORY IN IRELAND' 가 될까?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어디에서도 사랑에 빠지 듯이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어디에서도 사랑을 하지 못한다.
이게 내 결론이다.
나는 그 곳에서도 마음의 문을 닫았고, 그래서 또 다시 홀로 꿋꿋하게 사는 길을 향해 내달려야만 했다.
그게 나쁘다거나, 그런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나의 신조는, "교감없는 껍데기 뿐인 둘이 되느니, 온전한 혼자가 낫다" 이다.
혼자서도 '괜찮은' 이십대를 보내고 있다. 누군가가 곁에 없다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내가 아니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주변에 좋은 사람이 몇몇 스쳐지나가는데, 내가 그들을 발견해주지 못하고, 응답해주지 못해 떠난 사람들도 있다는 것.
내가 애정없는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던 그들이, 어쩌면 원석이었을 지도 모르는데 말야.
그리고 어떤 이는 그 원석을 알아보아 소중히 대했을 지도 모를 일이고.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것도 아쉽지만, 충분히 주지 못한 것이 더 슬프다.
셀린느와 제시 사이에, 나와 같은 차가운 시선과 기류가, 의심이 잠시라도 머물렀다면,
비포 선셋도,
비포 선라이즈도,
없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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